집 없는 집들이에 가다/ C3 건축과 환경 4월호 건축단상 2005
집없는 집들이에 가다
요즘 전에 없이 많은 주변 사람들이 집을 짓고, 집을 꾸미느라 열을 내고 있다. 처음엔 비교적 젊은 세대들에 국한된 현상인 듯하더니, 요즘은 부지런한(?) 장년 층에게까지 이 열기가 확대되고 있는 듯하다. 어느 날 오후 아는 문화기획자 분으로부터 집들이를 한다는 뜬금없는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그 사람을 아는 주변 사람들이 아마도 백 명은 족히 방문을 하여 축하 인사를 나누다. 모두 따로, 또, 같이. 그의 집은 싸이월드라는 나라에 미니홈피라는 도시에 있다.
집이 없는 집들이에 가다. 여느 집들이는 음식냄새와 분주한 소란과, 낯선 느낌과 호기심이 교차하는 그런 공감각적인 체험이었을 것이다. 한 시간, 한 장소에 모이는 대신 사이버 공간에서의 집들이는 다층의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 내는 가상의 ‘집’에서의 ‘접선’이다. 문자로 전달되는 언어와, 사진으로 전달되는 이미지와, 특정한 사람들의 조합이 만들어 내는 소란함, 설렘 그리고 나름대로의 분위기도 있다. 이 사건은 참가하는 모두가 편리한 시간에 각자의 공간에서 따로 벌어지며, 또한 실시간으로 공유된다. 실제로는 어느 집들이에서 만난 낯선 얼굴을 다시 만날 일은 드물겠지만, 클릭 한번으로 이 날 만난 사람들의 ‘집’을 들어갈 수 있고, 그가 ‘일촌(에게만)공개’라는 빗장을 걸어놓지 않았다면, 왔다간 흔적 없이 슬쩍 집 구경을 할 수 도 있다. 잠깐 들러 ‘방명록’에 글이나 남겨야지 했다가, 다른 손님들의 집까지 모두 들르다 보니, 두어 시간이 금방 간다. 이제 그의 집들이를 가기 전보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네트워크와 그를 이루는 개개인이 만들어낸 이미지와 이야기의 모자이크를 통해 보는 그 사람은 왠지 다르다. 그와 가깝게 말하지 않고도, 그에 대해 많이 알게 된다. 서로 양방향 혹은 일방향으로 연결된 선들의 네트워크가 끊임없이 새로 만들어 지거나 사라지며 그 공간 또한 도시와 국가를 넘나든다.
수 년 전 잠깐 암스텔담에 거주할 때, 친구들의 집들이는 내가 ‘등록’ – 제도적으로, 경험적으로, 되어있는 장소를 벗어나 도시의 낯선 장소로 초대받는 특별한 사건이었다. 나를 초대한 이가 일러주는 주소로 지도에 점을 찍는다. 처음 가는, 혹은 스치기는 했으나 머물지 않았던 경로를 통해 낯선 동네에 들어서면 실타래를 풀어 숲으로 가 길을 헤매는 아이처럼 낯선 장소가 주는 신기함을 만끽한다. 때로 그 경로에서 맞닥뜨린 별 특별할 것 없는 디테일들이 오래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이 되기도 한다. 몇 번의 확인을 거치고, 종종 길을 잃은 끝에 만나는 집. 그의 집을 들어서면, 그 사람을 새롭게 읽게 되는 그 사람이 ‘등록’된 공간과 그 장소를 매개로 만나는 새로운 얼굴들이 기다린다. 나와 아무 상관없던 공간이 내게 인식되고, 기억되는 순간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주는 즐거움이 왜 내게 특별했을까? 아마도 여행가이드나 공식적인 안내 등등으로는 뚫기 어려운 도시의 평범한 일상으로 접근하는 비밀의 문을 발견한 듯한 감동 때문이었던 듯하다.
이렇게 개인이 개인을 자신의 사적 경험의 장소로 초대하는 사건을 통해 도시의 임의의 장소에 대한 경험이 전이되는 체계를 전용하여, 도시와 장소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생성하는 온라인 공간을 구현하는 것을 공모전에 출품한 적이 있다. 국제현상설계로 일본건축가 히로시 하라가 심사위원이자 semiotic field 라는 주제를 발제 하여 도시에 대한 제안을 내는 공모전이었다. ‘city as an open book’ 이라는 제목으로 웹 콘텐츠로 제안했던 안은 초대와 응대라는 형식으로 개인적인 장소에 대한 해석과 경험을 나누고, 그것이 실시간으로 지도에 기록 되도록 ‘설계’되었다. 이 때 의사소통의 매개가 되는 것은 장소의 이미지와 텍스트 이다. 마치 소설과 시가 언어를 아름답게 만들어 가듯, 이런 방식의 의사소통이 도시공간의 사용패턴에 물리적인 변화를 가져 올 수 있다는 야심 찬 가설을 가지고 제안한 프로젝트였다. 요즘의 온라인상의 개인홈페이지간의 교류를 보면, 당시의 상상이 현실화되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제안 속의 사이트는 물리적인 장소와 지속적인 관계를 갖고, 새로운 방식으로 연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으려 했다면, 현재의 많은 ‘사이버 집’들은 물리적인 세계의 체계를 은유 하지만 서로 상호작용하는 관계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개인과 개인, 개인과 환경의 관계를 형성하고 영향을 주는 매개로서 집-이웃-동네-도시라는 물리적 장소의 체계를 은유 하며, 빠르게 확대되고 있는 ‘가상의 집’, ‘가상의 공동체’, ‘가상의 도시’가 시사하는 것은 무엇일까? 시장논리로 구축되는 ‘거주의 장소’에 수동적으로 적응하며 살게 되는 나를 비롯한 많은 개인들은 집과 이웃, 동네, 그리고 도시라는 자신을 등록-사회적으로, 심리적으로, 시킬 일련의 위계를 가진 장소의 체계를 물리적인 세계에서 찾기보다 가상의 세계에서 찾는 것이 훨씬 용이하다는 것을 깨달은 듯하다. 이는 이웃 혹은 동네 같은 소단위의 준거가 되는 공간을 잃어버린 상실감과 관련 있지 않나 싶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바겠지만, 나는 서울의 위성도시인 수원에 살면서 생활의 주 터전은 서울이 되어 오랫동안 통학과 통근을 해왔다. 이렇게 원거리의 여행을 하며 생활을 하다 보면 나의 근거지들은 무려 십 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반경을 가지고 흩어져 있게 된다. 마치 여러 겹 주름이 잡혀있는 표면을 이동하듯 띄엄띄엄 도시를 가로질러 살고 있다. 동네 슈퍼라든가, 조그만 놀이터, 초등학교 운동장, 바로 이웃에 사는 가족들은 내게 아주 생소한 대신, 서울 곳곳에 흩어져 있는 까페들과 식당과 공연장과 일터의 점들의 집합이 내게는 ‘이웃’과 ‘동네’가 된다.
이웃과 동네가 그리운 도시사람들이 모두 가상의 공간에만 집을 짓는 것은 아니다. 도심공동체 ‘마포두레생협’에 대한 이야기는 이 공동체가 동네가 자리잡고 있는 ‘성미산’의 배수지 공사 중지를 이끌어내면서 널리 기사화된 바 있다. 마포두레생협은 생활재 공동 구매를 통해 유기농을 지원하고 산지 직거래 활동을 하는 생활 협동조합으로 성산동에서 합정동에 이르는 반경 2KM의 지역을 기반으로 꾸려진다. 흥미로운 점은 왜 2KM 인가에 대한 것인데, 걸어서 쉽게 왕래가 가능한 거리이며, 학교, 시장 등 서로 일상의 공간을 공유하면서 잘아는 관계가 가능한 거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공동 육아 어린이집, 도서관 같은 공동공간, 얼마 전에는 대안학교까지 공동체가 함께 운영하는 일상의 공간과 프로그램을 만들어 가는 이 공동체의 예는 근접한 이웃의 힘, 그리고 근거리의 공동체가 함께 가꿔갈 수 있는 실질적인 프로그램들과 필요한 공간들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일상의 구체성에 근거한 소단위 도시 공간구성이 중요하다.
이번 학기는 학부 2학년 설계스튜디오를 진행한다. 나도 그랬지만, 처음 건축을 접하는 학생들은 대개 ‘주거’라는 프로그램으로 첫 설계수업을 시작하게 된다. 주거라는 프로그램의 보편적이면서도, 포괄적이고도 은유적인 속성 때문이리라. 그 포괄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집의 설계는 개별적인 ‘건물’이 아닌 현재의 ‘거주한다’ 라고 하는 의미에 대한 탐구라고 봐야 할 것 같다. 거주의 의미가 점점 집의 경계를 넘어 도시로, 물리적인, 혹은 전혀 물리적인 기반이 없는 여러 층위의 요소들의 ‘건축적인 조합’ 혹은 ‘장소적인 조합’으로 확대되고 있는 지금에는 어떤 의미에서는 ‘집’이 오히려 첫 설계과제로서는 좀 어려울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첫 수업, 각 자의 집을 관찰하고 기록하여 오라는 과제를 내어주었다. 한편으로는 정량적으로 실체를 드러내며 거기에 있는 것을, 다른 한편으로는 정성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거기에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관찰하고, 측정하고, 재현하여 스튜디오의 다른 학생들과 의사소통 할 수 있도록 작업해 오는 과제이다.
궁금하다. 학생들이 자로 재고, 사진을 찍어 기록하고, 도면과 그림으로 재현하는 거기에 있는 집은 어떤 공간일까? ‘거주한다’ 라고 하는 프로그램의 어떤 부분을 관찰하고, 어떻게 그려올까? 집과 집이 위치한 이웃과 동네와 도시의 관계가 사뭇 달랐던 내가 십여 년 전 그렸던 그 집과 같은 집일까? 집 없는 집들이에 갔다 오니 왠지 학생들이 정성스레 그려올 – 대부분이 아파트일, 그 집에는 ‘집’이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뚱맞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