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창조하는 건축

일상에서 창조하는 건축/건축인 poar 2003 4월호 새로운 건축인을 찾아서 기획기사

 

작업일기

0-1

얼마전 부터 학생들과의 스튜디오에서 학기 초반에 웜업(WARM UP) 프로젝트로  오브젝트 스무고개 라는 연습을 한다.  한가지 오브젝트의 스무가지 재현을 하는 것이다. 정답은 없지만, 나는 학생들이 한가지 오브젝트를 지금 현재의 모습으로서 뿐만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관찰의 스케일에 따라 갖는 모든 모습을 포함한 시스템으로 파악하기를 바란다.  예를 들어, 책상이 있다고 하자. 그 책상을 가까이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대부분 빈 공간인 전자구름과 핵으로 구성 되있고,  시간을 거슬러 들여다보면 한 그루의 나무이기도 하며, 동사무소에 신고를 하고 내놓아야 하는 폐기물이기도 하다.  이런 순환의 과정에서 책상은 일련의 그룹의 사람들의 손을 거치며, 다양한 경제 ,사회활동과 연관되고, 전혀 다른 의미가 되기도 한다.  건축과 도시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작업공간의 이름은 01studio이다. 여기서 작업공간이라 함은 공간적인 장소라기 보다, 조직적인 단위이고, 작업이 이뤄지는 개념적인 틀이기도 하다. 디지털이라는 의미인가 하고 질문하시는 분이 많지만, 딴에는 많은 고민을 담은 작업의 화두를 담았다.    0-1은 아무 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최초의 무언가가 나타나는 순간의 사이이다. 건축을 도시를 나아가서 세상을 딱딱하지 않게 보는 것, 말랑말랑 하고 늘 움직이며,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 사라지지만,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서 다른 모습으로 재현될 수 있는 순환되는 시스템으로 이해하는 것이 0-1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순환의 프로세스에 개입하는 건축가의 역할과 제안의 형식, 그 방법론이 중요한 주제이다. 한 system theorist가 말하기를 world=action+will 이라고 했는데, 나는 이 공식이 건축과 도시를 설명하기에도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물리적으로 구축되는 건축(world)는 누군가의 의지(will)와  그 의지를 실행에 옮기는 action의 연속되고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건축을 한다고 함은 이러한 의사결정과정의 어느 시기에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 하는 것을 디자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작업일지

개별적인 프로젝트는 개별적으로 완결되는 것뿐만 아니라, 각각을 통해 도시 조건을 드러내고, 디자인 방법을 실험하는 하나의 케이스가 된다.

작은 스케일의 작업은 실험적인 개념 모형을 적용해  1:1 스케일에서 어떤 영향을 갖게 되는지가 금방 나타나고, 재료, 구조, 디테일 같은 깊은 주제들과 연관되면서 흥미진진해 진다. 독립하고 나서 나의 첫 커미션은 10평 남짓의 구둣가게의 인테리어였다.  전면의 파사드에 비해서 깊이가 깊은 가게구조, 인지도를 높이는 디스플레이라는 요구조건에 대해서, 평면적인 구두디스플레이대의 구조에 요철을 주어 전면 부에서 입체적으로 가시화 될 수 있게 했다.  판판한 종이에 칼집을 내어 잡아당겨 만들어진 요철처럼 이음새 없는 가구를 제작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지만, 샘플을 제작하면서 예산과 제작조건상 전혀 다른 재료와 디테일을 가진 가구로 새로 태어났다.

비슷한 규모의 작업으로 즐겁게 일했던 프로젝트는 일본건축가 유코 네즈와 협력한 아이를 위한 가구( FUrN Project의 일부) 이다. 표면을 겹겹이 싸고 있는 쿠션을 가진 fabric의 조각들과 내부의 테이블겸 장난감 보관함의 알맹이의 두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가구를 쓸 때 마다 조각보를 펼치듯 놀이를 하는 ‘공간’이 만들어지는 장난감같은 가구를 디자인했다. 이 프로젝트는 messenger project 이다. 암스텔담에 있는 유코 네즈와 나는 작업기간 내내 msn messenger로 의사소통했다. 마감을 앞두고 이틀정도는 낮과 밤이 다른 시차를 그대로 느끼면서 꼬박 인터넷에 연결되어 작업을 함께 했다.  FUrN Project는  좌식, 입식의 전형적인 구분 등에서 벗어나, 가구와 생활공간의 새로운 경계들을 찾아보려고 하는 연구프로젝트이다.

밀양시립박물관계획안 역시 공동작업으로 조성룡도시건축과 작업하였다. 지역의 문화공간으로 고유함을 가질 수 있는 특화된 전시공간을 지향하고, 공원에 속한 문맥을 살려 연속된 관람공간의 전개와 그와 만나는 외부공간의 구성을 입체적으로 구축하는 것이 주안점이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경기도의 동북부 두 도시, 두 대상지의 수십 만평에 달하는 필지들에 대한 strategic plan을 만드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수도권의 교외(suburban)도시의 법적, 사회적 조건을 파악하고, 그에 바탕을 둔 전략을 세우는 것이 관건이었다.  서울을 벗어난 수도권의 교외도시들은 비슷한 어려움을 갖고 있다.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지만, 서울 의존적인 구조를 벗어나기 어렵다.  거대한 밀도를 가진 개발을 통해 장소성을 인위적으로 창출하는 개발방식을 취하기 어려운 교외지역에서의 큰 필지들은 장기적이고 단계적인 방식의 계획을 필요로 한다. 지자체의 정책, 중앙정부정책, 그리고 땅을 소유한 건축주의 서로 충돌하거나, 합치되는 필요들의 역학적인 구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두 사이트 공통적으로 장기적인 장소이미지 창출을 위해서 단계적으로 노드를 개발하고 그들을 이용한 프로그램을 실행하면서 점차 노드들간의 연계를 통해 장소의 의미를 확대하여, 간접적으로 파장되는 수익사업을 하는 방식을 시나리오형식으로 제안했다.

 

늘 무언가를 배우고 있지만, 독립해서 일을 시작한 지난 1년은 또 다른 차원의 ‘공부’시간이었던 것 같다. 0-1스튜디오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최소한의 단위조직을 지향한다. 프로젝트에 따라 다른 조직과 결합해서 크고 작게 변모할 수 있는 유연한 조직으로 그 자체 완결된 조직으로의 성장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사회 전체적으로 소단위의 조직은 점점 증가하고 있고, 이런 조직간의 상승작용이 있는 연합을 이루는 시스템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工夫

공부란’스터디(study)’와 동일한 내포를 가지는 단순한 지식의 축적(accumulation of knowledge)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공부란 한마디로 ‘몸의 단련'(physical discipline), 다시 말해서 신(身)을 수(修)하는 것, 즉 수신(修身)을 의미한다. 수신(修身)의 신(身)은 인식작용을 갖는 단순한 심(心)이나 식(識)이 아니며 인간의 ‘몸’에 구현되어 있는 인격 전체(total personality)를 뜻한다. -김용옥 ‘여자란 무엇인가’ 중에서

 

위에서 인용한 ‘공부’라는 의미에서 건축공부의 과정을 본다면, 학교에 속해서 학생으로서 작업하던 시간, 조직에 속해서 실무를 하던 시간, 유학생활의 기간, 그리고 독립적으로 일해온 시간 모두가 일련의 건축공부의 과정이었고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이 순간도 계속되고 있다. 쇳덩이를 뜨겁게 차게 단련하는 것처럼, 변화되는 환경 속에서  연속되는 ‘건축’과 ‘도시’에 대한 생각을 정립해 나가고 그것을 실행하는 나의 ‘몸’을 단련해 가고 있다고 하는 것이 적합한 표현이란 생각이 든다.

학부를 졸업하고 몇 년의 실무를 하고 나서는  건축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보다는 건축이란 무얼까, ‘건축가’라는 직능을 나름대로 정의하고, 스스로 환경을 만들 수는 없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3년 간의 유학과 그 곳에서의 생활은 짦았지만, 그 의문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자극 받고, 함께 토론할 좋은 친구들을 만났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외부적인 자극보다, 내 자신의 일상적이고 주관적인 삶에서 건축과 도시를 보는 보편적인 이야기들을 끄집어내는 것이야말로 유학생활 이전의 ‘공부’에 비교해 가장 큰 변화였고, 그 과정을 통해 가장 많은 배움과 자극을 얻었다. 온갖 거대담론으로 프로젝트를 설명했을 때, 크리틱을 해주던 선생님으로부터 ‘이 중에서 넌 뭘 제일 좋아하냐?’ 고 질문 받았던 그 순간 당황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옳은 건축이 아닌 좋아하는 건축, 내가 믿는 건축을 찾아내는 일은 쉽지 않다. 좋아하는 건축으로 보편타당을 획득하기까지는 엄격한 방법론의 정립을 요구하는 만만찮은 프로세스가 필요하다. 그런데, 바로 그런 과정을 통해, 건축과 도시에 대한 기존의 정의에 대한 부단한 도전, 실험이 행해질 수 있는 것이다.

Berlage에서 공부하는 기간에 구체화되어 지속적으로 가지게된 관심주제는 콘크리트를 빨리 양생하면 크랙이 생기고, 살이 급속하게 찌면서 튼 살이 생기는 것처럼, 초고속의 성장을 하고, 여전히 급격한 변화를 겪는 도시 서울의 곳곳에 존재하는 ‘크랙 사이트’와  그곳에서 생성되는, 혹은 생성될 수 있는 인스턴트식의 도시원형이다. ‘서울’이라는 나의 개인적인 도시경험에서 글로벌한 이슈를 찾아내고, 그것을 가지고 서울에 대한 직접경험이 없는 많은 사람들과 의사 소통하면서 서울은 나에게 개인적인 경험의 장소에서 새로운 건축과 도시의 원형이 태어나는 실험실이 되었다.

서울은 혹은 서울로 대변되는 우리의 도시는 현대도시와 건축에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흥미로운 도시현상들이 채 관조하고 이론화 할 시간적인 여유를 주지 않고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시시각각 변화하는 이러한 변화의 벡터들을 다양한 시간과 공간의 스케일로 관찰해야 하고, 중요한 것은 건축가로서 도시계획가로서 개입이 가능한 사이트로 ‘재현’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실무를 통해서, 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스튜디오 작업을 진행하면서, 도시워크셥을 통해서 여전히 이 주제는 내가 은유와 모델에서 벗어나 현실에 적용하고  구체화시키는 방법론에 도달하기까지 앞으로의 작업에서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야 하는 숙제이다.

어떤 학부 1학년생이 2학년 전공선택을 앞두고, 자신은 건축과에 가고 싶은데, 주변에서 장래가 불투명하다고 이야기한다면서, 어쩌면 좋겠느냐고 물어왔다.  요즘 이런 비슷한 질문을 꽤 자주 받는 것 같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면 어떤 대답을 하고 나서건 속으로 내 자신에게 같은 질문을 되묻게 되곤 한다. 디자이너는 앞으로 올 것들을 그린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생겨날 일에 대한 예견은 우리의 중요한 업무중에 하나지만, 나는 디자인은 과학적인 예견이기에 앞서 신념이란 생각이 든다. 유학을 가든, 실무를 하든, 그런 신념이 없으면 언제나 흔들린다. 그 학생에게 내가 이 지면을 통해 대답한다면, 그리고 나 자신에게 다시 이르기를  ‘믿는 대로하라’.